
조직이 당신에게 "이건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고 말할 때, 그 말 속에 당신이 실패할 경우 어떻게 될지는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저는 그걸 대기업 연구소에서 직접 겪어보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영화 아폴로 18호를 처음 봤을 때 우주 공포물이라고 생각했는데, 보고 나서 가장 오래 남은 건 외계 생명체가 아니라 그 뒤에 있는 구조였습니다.
비밀 임무가 시작되는 방식
아폴로 18호는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 형식으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파운드 푸티지란 실제로 발견된 기록 영상인 것처럼 구성된 촬영 기법으로, 관객이 현실처럼 느끼게 만드는 효과가 있습니다. 이 형식 자체가 영화의 핵심 메시지를 강화합니다. 진실은 숨겨져 있고, 우리가 보는 건 누군가 겨우 남긴 파편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거죠.
영화 속 우주비행사들은 공식적으로 취소된 달 탐사 임무에 비밀리에 투입됩니다. 명분은 국가 안보였고, 실제 목적은 달 표면에 군사 감시 장비를 설치하는 작전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평범한 탐사처럼 진행되다가 정체불명의 소음, 샘플의 이상 변화, 소련의 비밀 우주선과 사망한 우주비행사를 발견하며 상황이 뒤틀리기 시작합니다.
제가 직접 경험해봤는데, 이 도입부가 낯설지가 않았습니다. 프로젝트 킥오프(Kick-off) 단계, 그러니까 새 프로젝트가 공식 출발하는 시점에는 항상 분위기가 고조됩니다. "이번엔 다르다", "중요한 임무다"라는 말이 반복되고, 실무자들은 그 에너지에 올라타게 됩니다. 문제는 그 에너지가 판단력을 흐리게 한다는 점입니다. 저도 초반에 데이터가 불안정하다는 걸 느꼈지만, "지금 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그게 첫 번째 실수였습니다.
조직이 위험을 인지하고도 멈추지 않는 구조
영화에서 가장 섬뜩한 장면은 외계 생명체보다 다른 데 있습니다. 정부가 이미 위험을 알고 있었다는 정황, 그리고 그럼에도 임무를 강행했다는 의혹이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대원 중 한 명이 감염 증상을 보이기 시작하고, 통신은 차단되고, 결국 생존한 대원마저 귀환이 거부됩니다. 감염 위험을 이유로 든 결정이었지만, 실제로는 사건 자체를 은폐하기 위한 선택에 가까웠습니다.
이걸 보면서 저는 제가 일하던 프로젝트의 후반부가 떠올랐습니다. 내부 테스트에서 이미 불안정한 결과가 반복됐고, 저는 보고서에 리스크 매트릭스(Risk Matrix)를 작성해서 올렸습니다. 리스크 매트릭스란 프로젝트에서 발생 가능한 위험 요소를 발생 가능성과 영향도 기준으로 정리한 표로, 의사결정권자가 판단할 수 있도록 돕는 도구입니다. 그런데 돌아온 답은 언제나 같았습니다. "타이밍상 지금은 멈출 수 없다." 그 말이 반복될수록 리스크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위험해졌습니다. 아는데도 진행한다는 기록이 남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을 심리학에서는 매몰 비용 오류(Sunk Cost Fallacy)라고 부릅니다. 이미 쏟아부은 자원이 아까워서 더 이상 의미 없는 일을 계속하게 되는 인지 편향입니다. 조직에서는 이 오류가 개인의 판단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작동합니다. 이미 발표 일정이 잡히고, 예산이 집행되고, 외부에 공표까지 된 상태에서 멈추는 건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엄청난 정치적 비용을 감수하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모두가 알면서도 아무도 먼저 멈추자고 말하지 않는 상태가 만들어집니다.
국내 조직심리 연구에서도 이런 집단 침묵 현상이 반복적으로 확인됩니다. 구성원들이 문제를 인식하고 있어도 발언에 따른 불이익을 우려해 침묵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출처: 한국심리학회:https://www.koreanpsychology.or.kr). 영화 속 우주비행사들과 저의 상황이 겹쳐 보였던 건 단순한 감정이입이 아니었습니다.
영화 속 상황에서 무너지는 요소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통신 차단: 외부에 상황을 알릴 수단이 사라짐
• 장비 고장: 독립적인 판단과 행동이 불가능해짐
• 상호 불신: 감염 여부를 알 수 없어 동료 간 신뢰가 붕괴됨
• 귀환 거부: 조직이 개인의 생존보다 은폐를 선택함
이 네 가지는 우주선 안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개인 희생이 반복되는 이유와 우리가 볼 수 있는 것
결과 발표 이후 저의 상황은 빠르게 달라졌습니다. 예상했던 문제들이 외부에서 지적되기 시작했고, 프로젝트는 축소됐습니다. 그때까지 함께 밀어붙이던 사람들은 하나씩 빠져나갔고, 책임은 실무자 몇 명에게 집중됐습니다. 저도 그 안에 포함됐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함께 결정하고 함께 진행했는데, 실패라는 결과물은 결국 저 혼자 들고 서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이걸 경영학에서는 책임 귀인(Attribution of Responsibility)의 왜곡이라고 말합니다. 성공의 원인은 조직 전체로 분산되고, 실패의 원인은 특정 개인에게 집중되는 현상입니다. 조직 내 권력 구조가 이 왜곡을 가속화합니다. 아폴로 18호에서도 이 구조는 그대로 반복됩니다. 임무는 국가의 이름으로 진행되지만, 그 결과는 기록에서 지워지고 진실은 몇 개의 영상 클립으로만 남습니다.
조직행동론(Organizational Behavior) 관점에서 이 문제는 단순한 도덕의 문제가 아닙니다. 조직행동론이란 조직 내 개인과 집단의 행동 방식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으로, 왜 조직이 특정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분석합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개인을 소모하는 구조는 나쁜 사람들이 만드는 게 아니라, 책임을 회피하기 쉽게 설계된 시스템이 자연스럽게 만들어내는 결과입니다.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챌린저호 사고 이후 진행된 로저스위원회 조사 보고서에서도 기술적 결함보다 조직적 의사결정 실패가 핵심 원인으로 지목됐습니다(출처: NASA:https://www.nasa.gov). 알고 있었지만 멈추지 않은 구조, 바로 아폴로 18호가 보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나쁜 의도를 가진 사람이 없어도 이런 결과가 나온다는 게 더 무서운 지점입니다.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합리적인 선택을 했는데, 그 합리성들이 모여서 비합리적인 결과를 만들어내는 구조. 이게 반복된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폴로 18호가 단순한 우주 공포물이 아닌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 영화는 달이 아니라 조직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이고, 외계 생명체가 아니라 시스템이 사람을 어떻게 소비하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꽤 오랫동안 그 감각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 목표가 맞았느냐"보다 "그 방식이 정당했느냐"를 먼저 물어야 한다는 생각이요. 당신 주변에 지금 누군가가 멈추자고 말하지 못하고 있다면, 한 번은 그 이유를 물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